크리스챤 디올
Dior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Dior Christian.1905.1.21~1957.10.24남)
1947년 자신이 이름으로 작게 오픈한 양장점에서 오늘날 세계 명품 계열에 올라선 디올 브랜드.
그는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출생,건축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에콜 리브르 데시앙스 폴리테크에서 수확하고 외교관을 지망했다.
비교적 디올은 어린시절 행복하고 순탄 했다. 아버지는 사업가,어머니는 내조에 충실한 우아한 여성이었으며 이러한 어머니는 그의 감각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30년 세계공항때 그의 집안이 파산하여 한때 화랑을 열기도 했다.
1935년부터 생활의 방편으로 드레스와 모자의 크로키를 그리기 시작하여 1938년 R.피게의 양장점 디자이너가 되었다.
대부분 어린시절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수도 없이 구경하며 보냈다.
부모의 권유로 정치대학을 마친 뒤 디올은 친구 자크 봉장과 함께 화랑을 오픈함으로써 예술계로 복귀한다
1947년 최초의 콜렉션으로 디올사의 성공은 보장받게 된다.
크리스챤 디올사의 뉴룩`은 전쟁 당시의 뻣뻣한 실루엣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아름다움을 부각시켜주는 것이었다.(필자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현재 성공한 모든 명품 브랜드는 하나같이 당시 1~2차 세계대전과 급격한 경제성장과 하락의 반복으로 패션계 디자이너들은 여성의 실용성을 강조한 실루엣과 소재 딕테일에 관심을 갖는다.이또한 여성 사회 진출과도 맞물리는 현상으로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결과물이다)
디올은 스커트의 길이와 넓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였고 여성 상체를 강조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관능성과 풍만함을 요구하던 세계에서 디올이 선택한 변화는 크게 환영 받는다.
자신의 브랜드를 확산 시키기 위해 자크루에의 친구 도움으로 많은 매장을 확보하게 된다.
1947년 향수가 탄생되고 49년에는 고품질 프레따 포르테를 제작 크리스티앙 회사가 설립된다.
미국의 넥타이와 스타킹 제조사와 라이센스 계약도 체결한다.
50년대는 악세서리 확산을 위한 전담부서도 설립된다. 52년 런던 지사도 개설하며 54년 란제리 부문 라이센스가 시작되며 여러 국가에 지사를 설립으로 공격적 확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튜립라인.H라인.A라인.러브라인등 발표하며 세계의 패션을 선도 56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1957년 스핀들 라인을 발표한후 거침없는 도약과 동시에 생을 마감한다.그의 나이52세였다.
그의 경영 후계자는 회사의 정체성에 충실한 마르크 보앙이 이어받는다.
패션 크리에티브 부문에는 이브 생 로랑이 전담 하게 된다.이후 황금 골무상을 받게되는 이탈리아인 지안 프랑코 페레로 이어진다(이미 필자가 패션글에 소개된 지안프랑코 페레 참조)
이후 1997년 영국출신의 존 갈리아노가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된다
존 갈리아노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를 둔 그는 지브롤터에서 태어나 16세에 학교의 정규과정을 그만두고 런던 칼리지에서 옷감 디자인 공부를 하게된다.
1984년 명성있는 세인트 마틴 스쿨 오브 아트의 졸업장을 받고 프랑스 대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8벌의 의상으로 미니 콜렉션 쇼로 성공을 거둔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처럼 그의 작품은 매우 이국적 스타일로 작품성을 인정 받는다
요란스럽고 다종족적인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타며 오토바이 부츠를 신고 사치스럽고 수상쩍은 사람처럼 머리를 땋아 늘이고 레트 버틀러식 콧수염을 과시하는 존 갈리아노는 분명 디올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특이한 디자이너이다.
오늘날 디올사의 아틀리에에서 맞춘 황태자 의상을 입는 그의 도전에 의연히 응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다. 낭만과 복고를 조화 시키는 그의 콜렉션은 디올사의 정신을 표하는 현대적 경의를 나타내며 세계 언론으로부터도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다음시간엔 디올 옴므로 소개할까 한다.